한 성직자가 보여준 아낌없는 사랑이 온 국민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아프리카 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에서 8년 동안 헌신적인 삶을 살아온 이태석 신부. 가난과 질병, 그리고 전쟁의 고통에 시달려온 이곳 주민들에게 그는 신부이자 의사였고, 지휘자이자 건축가였고, 선생님이자 아버지였다. 자신의 재능을 오직 톤즈의 미래를 위해 쏟아부은 그는, 1년이 넘게 암 투병 생활을 해 오다 지난해 1월14일 선종했다. 마흔여덟 젊은 나이였다.
고(故) 이태석 신부의 아름다운 삶을 찾아나서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의 사랑에 감동하고, 그의 죽음에 슬퍼하고, 그의 정신을 이어가려는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 곁을 떠난 지도 1년이 되어가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보여준 그의 아름다운 향기는 종교와 세대의 벽을 넘어 퍼져가고 있다.
이태석 신부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를 찾는 관객들의 발길은 새해 들어서도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9월 초 개봉 당시 주로 가톨릭 신자들이 영화관을 찾았다면, 12월 중순 재개봉이 된 이후에는 종교는 물론 연령과 직업도 다양한 관객들이 스크린 속 이신부를 만나기 위해 이른 아침 극장 문을 두드리고 있다.
서점가에도 이태석 신부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암 투병 중이던 지난 2009년 5월에 출간된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는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이 올랐다. 그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책으로, 오지 마을 톤즈에서 생활하며 겪었던 일과 이를 통한 깨달음이 녹아 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종교 분야 3위를 기록하며 꾸준하게 판매되고 있다.
늘어나는 관객과 독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은 이들의 반응이 뜨겁다. 영화를 본 한 네티즌은 “사람이 사람에게 꽃이 된다는 것, 사람의 향기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을 깨닫게 해준 소중한 경험이었다”라고 밝혔다.
▲ 이태석 신부가 암 투병 중 열린 음악회에서 수도원 후배들을 지휘하고 있다.
ⓒ사진제공 이태영 신부
지자체·기업들 영화 단체 관람도 이어져
이처럼 이태석 신부의 삶이 감동적인 이유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삶 속에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 사회적 약자에게 희망과 꿈을 갖게 한 사랑과 헌신이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혹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그의 강인하고 숭고한 정신 앞에서 나약하고 이기적인 자신을 발견하고 반성하게 된다.
이태석 신부의 정신을 이어가려는 움직임은 점점 사회 각계로 확산되는 분위기이다. 정·관계에서는 ‘이태석 신부를 모르면 대화가 안 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제가 되고 있다. 이재오 특임장관은 지난해 말 직원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면서 송년회를 가졌다. 진수희 보건복지부장관도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필름을 빌려서 직원들이 관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이미 몇몇 자치단체와 지역 의회에서는 종무식과 시무식 때 이 영화를 상영해 단체 관람을 했다. 기업들도 이러한 열기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 이태석 신부는 의대에 다닐 때에도 음악과 함께했다
ⓒ사진제공 이태영 신부
이태석 신부의 삶은 특히 사회 지도층에게 새로운 리더십의 전형을 제시해준다. 영화를 감독한 구수환 KBS PD는 “민심이라는 것이 강제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목적을 갖고 대하기보다 진심으로 다가갔을 때 마음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태석 신부님이 ‘톤즈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금전적인 지원 때문이 아니다. 아프면 두 손으로 어루만지고, 힘들면 온몸으로 보살피고, 늘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되었기에 가능했다. 사회적 약자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보고 배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항상 사람이 중심인 ‘감성의 리더십’과 어떤 난관도 뚫어내려는 ‘긍정의 리더십’도 마찬가지다. 이태석 신부가 톤즈에 들어갈 당시부터 친분을 이어온 이재현 수단어린이장학회 이사장은 “모든 일에서 논리보다는 사람을 앞세웠다. 소수의 몇 명이 희생되는 것도 아파했고, 이들을 저버리지 않고 함께 이끌어나갔다. 또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늘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착각을 하더라도 긍정적인 착각을 하라고 했다. 간혹 주변에서 답답해할 정도였지만, 이러한 리더십이 ‘톤즈의 기적’을 낳은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교육계에도 이태석 신부의 삶이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가고 있다. 그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교육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성당보다 학교를 먼저 지었을 것 같다”라고 밝힐 만큼 애착이 컸다. 병마와 싸우는 힘든 시기에도 자신보다 톤즈 아이들을 먼저 걱정했다.
교육에 대한 그의 열정적인 삶은 교사들을 극장으로 이끌고 있다. 지난해 12월 서울 시내 중학교 교장·교감 등 교직원 2백40여 명이 <울지마 톤즈>를 관람했다. 각 학교별로 단체 관람이 계속 확산되고 있다. 임정희 ‘밝은 청소년’ 이사장은 “사랑을 베푸는 것 자체가 교육이라는 메시지를 주었다. 신부님의 삶을 알게 된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이 교육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해준다’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된 것 같다”라고 밝혔다.
의료계에서도 자성의 목소리 나와
▲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한 이태석 신부
ⓒ사진제공 이태영 신부
학생들 사이에서도 변화가 일고 있다. ‘밝은 청소년’은 현재 학생들로부터 이태석 신부의 삶에 대한 감상문을 받고 있다. 임이사장은 “단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말한다. 또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행복을 누리고 살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살아가겠다는 학생도 많다”라고 전했다.
의료계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의료가 복지보다는 산업 측면이 부각되면서 의사도 수익을 올리는 경제인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런데 이태석 신부의 봉사와 헌신을 보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의사 본연의 임무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임재현 서울나누리병원 원장은 “의대에 입학할 때 가졌던 사명감을 세월이 흐르면서 잊고들 살았다.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고 또 각성도 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이태석 신부는 우리 사회 전반에 나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톤즈에서 새로운 ‘하늘나라 수학’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가진 것 하나를 열로 나누면 우리가 가진 것이 십분의 일로 줄어드는 속세의 수학과는 달리, 가진 것 하나를 열로 나누었기에 그것이 1000이나 10000으로 부푼다는 하늘나라의 참된 수학, 끊임없는 나눔만이 행복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행복 정석을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라고 밝혔다.
이태석 신부를 후원해 온 수단어린이장학회는 이신부가 선종하기 전 3천명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1만3천명으로 네 배 이상 회원이 늘어났다. 후원자도 8백명에서 4천명으로 늘었다. 장학회는 ‘1% 나눔’을 통해 그가 계획하고 있던 사업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우선 현지 병원을 운영할 의료진을 파견할 예정이다. 지난해 실태 조사를 마쳤다.
교사 파견도 예정되어 있다. 이태석 신부가 선종하면서 가장 걱정스러웠던 부분이 교육이다. 다행히 시스템을 잘 갖추어 놓은 덕에 무리 없이 운영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재현 이사장은 “톤즈 학생들의 한국 유학은 현재 진행이 되고 있다. 2009년 두 명의 학생이 한국으로 왔고, 지난해 말 또 한 명이 유학을 왔다. 모두 신부님이 아들처럼 아꼈던 아이들이다”라고 설명했다. 장학회는 그 밖에도 각 분야별 릴레이 봉사단과 한국 학생을 대상으로 한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 중이다.
“나눔은 사랑이며 관심이다”
▲ 톤즈의 아이들과 소풍을 즐기는 모습
ⓒ사진제공 수단어린이장학회
이태석 신부는 톤즈에서의 생활이 고통이 아닌 행복이라고 여겼다. 투병 중에도 힘들어 하지 않고 밝게 웃었다. 어떠한 어려움에도 항상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암 진단을 받은 직후 열린 음악회에 참석해서는 “감기에 걸렸다”라며 아픔을 숨겼다. 숨을 거두기 직전 그는 병간호를 하던 누나와 동료 신부에게 안심하라는 손짓을 하면서 “everything is good”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태석 신부가 선종한 지 이제 1주기를 맞는다. 그는 자신이 타고난 재능을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위해 남김없이 소진했다. 그의 삶은 아름다운 한 송이 꽃과 같아 보인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까지 견디어 낸 고통과 인내를 말이다. 감동은 이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할 때이다. 그는 “나눔은 사랑이며 관심이다”라고 했다. 관심을 갖는 것이 나눔의 출발이라는 의미이다. “무관심은 엄연한 죄악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바로 무관심이기 때문이다.”
“1년 넘게 투병하면서 아픈 내색 한 번 안 했다”
이태석 신부의 형 이태영 신부 인터뷰
ⓒ시사저널 유광훈 기자
이태석 신부는 4남6녀 중 아홉째이다. 바로 위 형이 두 살 터울의 이태영 신부이다. 먼저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던 그는 군의관 제대를 앞둔 동생이 찾아와 “수도원에 입회하겠다”라고 했을 때 반대했다. “신부가 아니라 의사로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이 있다”라며 만류했다. 하지만 동생은 편안한 ‘아스팔트 길’이 아닌 험난한 ‘십자가의 길’을 선택했다. 지난 1월4일 부산시 기장군의 한 수도원에서 이태영 신부를 만나 동생이자 동료였던 이태석 신부의 삶에 대해 들었다.
이태석 신부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고아원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하루는 누나에게 실과 바늘을 달라고 하더니, 골목길에 있는 고아의 터진 옷을 꿰매준 적이 있다. 학창 시절에는 모범생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음악도 좋아했다. 과묵했지만 리더십이 있었다. 노력을 해도 헛되이 안 했다.
신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어떻게 했나?
군의관으로 제대할 무렵 마지막 휴가를 나왔을 때 찾아왔다. 수도원에 입회하겠다고 하기에 의사로서 봉사할 길이 있다며 반대했다. 몇 달을 고민하더니 어머니께도 말씀드리더라. 어머니께서도 하루 종일 우시면서 말렸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게 먹고 있던 터라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다.
아프리카 오지로 떠난다고 했을 때는 어땠나?
당시 누나가 ‘한국에도 어려운 벽지가 많은데 왜 꼭 아프리카로 가야만 하느냐’라고 물었다. 어머니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태석 신부는 ‘가본 곳 중에서 제일 가난한 곳인데, 가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나라도 가야 한다’라고 했다. 방학 때 방문했던 톤즈의 현실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고, 다시 가기로 결심을 한 상태였다.
톤즈에서 가족들에게 연락은 자주 왔나?
거의 하지 않았다. 아마 걱정할까 봐 그랬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통해 늘 ‘잘 지낸다’라는 소식만 전해왔다.
아프다는 사실을 가족들도 몰랐나?
2008년 9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을 때인데, 이태석 신부가 강의를 하러 왔었다. 혈압검사를 해보고 싶다고 하더라. 말은 안 했지만 몸이 안 좋다고 느꼈던 것 같다. 간단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이상이 없다고 나왔다. 그런데 3개월 뒤 한국에서 암이 발견되었다. 좀 더 일찍 알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암 투병 생활은 어땠나?
1년 넘게 투병 생활을 하면서 아프다는 표현을 한 적이 없다. 그 기간에 책이 나왔는데, 책을 나눠주면서 항상 ‘하느님은 정말 사랑이십니다’라는 글을 적어 주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 ‘정말’이라는 말을 보탰다. 마지막까지 진심 어린 마음으로 사랑을 전하려고 했다.
동요에서 성가까지…이태석 신부가 만든 노래들
ⓒ시사저널 유광훈 기자
이태석 신부는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다. 초등학생 시절 피아노 소리에 이끌린 그는 집안 형편상 피아노를 배울 수 없자 대신 성당에서 풍금을 배웠다. 두어 달 만에 그는 미사 반주를 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이때부터 작곡도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는 <해> <별> 등 쉬운 동요를 만들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여러 경연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부산시가 주최한 대회에서 성악 부문 장려상을 받는가 하면, 작곡 부문에서는 대상을 받았다. 당시 작곡한 곡으로는 <아리랑 열두 고개>와 같은 서정적인 곡과 함께 <묵상>이라는 청소년 성가가 있다.
<묵상>은 이후 그의 삶을 예언이라도 한 듯이 보인다.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라는 노래 가사처럼 그는 의사이면서 신부가 된 후 모든 것을 바치며 사랑의 삶을 살았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이들,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라는 대목은 그가 아프리카 오지로 가게 될 것을 미리 결정이나 한 것처럼 보인다.
의대에 다닐 때에도, 신부가 된 이후에도 그는 늘 음악과 함께했다. 수단이 20년 동안 지속되었던 내전을 종식하고 2005년 평화협정을 맺었다는 소식에 감격해 <슈쿠란 바바(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곡을 짓기도 했다. ‘평화’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전쟁’이 일시적으로나마 멈췄다는 소식에 감격해 지은 노래이다.